Zassenhaus Nr. 154 Kaffeemühle dunkles Holz Made in West Germany 80er Jahre
'안방'에 해당되는 글 238건
- 2023.02.28 Kaffeemühle alt
- 2015.06.21 그 섬
- 2013.09.16 유언장
- 2013.02.08 허우적
- 2011.08.25 이거, 어디서 읽고는 적어뒀는데, 어디서였더라...
- 2011.06.28 테마수필 그 여덟 번째 이야기 '친구'
- 2011.06.03 나는 기다리고 있다
- 2011.04.24 괴물
- 2011.03.24 UMC/UW 3집 2
- 2011.03.05 얼음찜질
고1 때 어린왕자를 처음 읽고는, 그런 별에야 갈 수 없지만 나만 살 수 있는 섬을 하나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더랬다. 그 뒤 사십여 년, 고향 서울을 떠나와서 머문 시골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도시화 될 때마다 그 마을에서 도망치고 도망치며 여기까지 왔는데, 이게 아마 섬으로의 여정이 아닐까 싶다. 분명히 끝내 섬을 갖지 못한 채 길에서 멈추겠지만, 그래도 마음에 섬을 품고 살아 좋았다고 말하며 웃을 수 있겠지.
권정생 선생님 유언장을 읽고서 나는 어떤 유언장을 쓸 수 있을까 골몰했지만, 몇 해 지난 지금, 아직 한 줄도, 아니 한 자도 적지 못 했다.
'아프리카에서 봉사했던 천사 같은 오드리 헵번'도 두 번 이혼했고
'밥퍼' 최일도 목사 다일공동체 후원회장으로 봉사하는 탈렌트 정애리 이혼,
"국민어머니"로 불리우는 탈렌트 고두심 이혼.
이혼하지 않고 참고 견디는 게 봉사보다 더 어렵고 힘듭니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봉사보다 고통을 더 가치있다고 여깁니다 .
'밥퍼' 최일도 목사 다일공동체 후원회장으로 봉사하는 탈렌트 정애리 이혼,
"국민어머니"로 불리우는 탈렌트 고두심 이혼.
이혼하지 않고 참고 견디는 게 봉사보다 더 어렵고 힘듭니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봉사보다 고통을 더 가치있다고 여깁니다 .
적어도 한 해 한 번, 많으면 두 번은 내는 일종의 동인지 성격인 우리 '테마수필'이 작년에는 자금난 때문에 건너뛰고 말았다. 그래서 작년 초에 낸 원고들을 실어 올해도 이미 반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오게 됐다. 이 글을 쓰고도 우리는 또 동무 둘과 동무의 배우자 하나를 잃었다. 과로로, 건강악화로, 사고로. 사람 일이란 아무도 모르는 법. 나도 또한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하고 싶은 일은 하다 가자고 마치 유행처럼 말을 하는 '하고 싶은 일은 하지도 못하고 사는 현대인들'. 거기에 대고 나는 고쳐 말한다. 하고 싶은 일은 고사하고 보고 싶은 얼굴들이라도 가끔 보다 가자고.
무엇이었을까, 무엇으로 나는 지금까지 허이허이 달려왔던 것일까…
국민학교 3학년 때, 사촌언니가 갖고 있던 화집에서 고호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숨이 턱 막혀서, 막혀서…목구멍에 불이 붙는 줄 알았다.
같은 해였던가 아니면 다음 해였던가, 역시 그 언니의 다른 화집에서 샤갈의 전쟁을 보았을 때도 웬 무시무시한 영상이 내 머리에 한 방 먹인 듯했다.
그리고 그즈음에 들었던 베토벤의 곡들은, 나로 하여금 전생에 베토벤이었을 거라는, 지독한 집착에 빠지게 했었지. 얼른 자라서 독일로 날아가고 싶었었다. 베토벤의 음악을 베토벤의 고향에서 듣고 싶었다.
5학년 때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또 그렇게 나는 몇 날 며칠을 잠을 이루지 못 했다. 넘기고 또 넘기고…참으로 질기게도 그 책을 읽었었다. 나도 내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무언가를 그렇게 글로 옮겨놓을 수 있을까, 처연하게 집착했었다.
그 해에 나는 마론 브란도가 나오는 영화를 줄줄이 봤다. 세상에나! 그런 눈빛을 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니…! 한 번이라도 헐리웃에 가서 그 아저씨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얼마나 숱하게 했던가? 만나게 된다면 제일 먼저 무슨 이야기를 하나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한참 세월이 흘러서 그의 죽음 소식을 듣고서, 나는 이미 다 자란 어른인데도 불구하고 헝헝 울었었다.
또한 카페 데아뜨르에서 추송웅, 김금지 선생님의 '타이피스트'를 보고, 한국일보사 사옥 꼭대기에서 함현진 오빠가 나왔던 '고도를 기다리며'에 미쳐 버린 것도 다 그즈음이 아니었을까.
중학에 들어가서 토스토옙스키의 '백치'를 읽었을 땐 한 달을 잠을 못 자고 무이쉬킨의 모습에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마지막 장면 생각을 하다가는 엉엉 소리내어 운 적도 있었다.
그즘에 또 사이먼 앤 가펑클의 'El Condor Pasa'를 듣고 하늘을 보며 마냥 슬프고 절망적인 생각에 잠기는 버릇이 생겼다. 가사 한 줄 한 줄 집어삼킬 듯 외고 또 외면서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외로웠었다.
또한 드보르작의 'Violin Concerto op.64'에 빠졌던 것도 그 무렵이 아니였던가. 집이 떠나가라 음반을 돌리면 주무시던 아버지가 방문을 뚝뚝 두들기곤 하셨다. "잠 좀 자자."
우연히 들은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의 음반을 찾느라고 청계천의 레코드상을 뒤져대던 시간들도 있었다. 고교 때 크리스토퍼슨의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의 가사에 홀딱 빠져 밤이나 낮이나 흥얼거리며 기타를 긁어대 식구들을 괴롭히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미쳤었던 테리 잭스의 'Seasons in the Sun'만을 부르며 제2한강교를 추운 겨울에 몇 차례나 오락가락했는지…?
그리고 그 때 또 나를 정신 빠진 년으로 만든 건, 케스트너의 '파비안' -그 런 남자를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 콕도의 '무서운 아이들', 필립의 '뷔뷔 드 몽빠르나스'였다. 작은 손바닥 책들이 나달나달해지도록 읽고 또 읽었다.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그것들은 정말로 무서운 기세로 나를 두들겨댔고, 거기에서 헤어나오는 데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을 기억한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오면서 그렇게까지 무서운 충격으로 나를 때리는 것을 더 이상 만나지 못했다. 물론 그 때도 지금도 나를 감격시키거나 잠 못들도록 힘들게 한 것은 많았지만, 어떤 것도 어릴 때처럼 그렇게 오래도록 나는 아프게 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너무 아름다워서 아팠던 그 기억들…! 더는 그런 것들을 만날 수 없는 때가 묻어 버린 나 자신이 참 부끄럽고 싫었다. 그런데 두 해 전이었나, 조공례 선생님의 '진도 아리랑'을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밤에 전깃불도 켜지지 않은 어둠 속에서 들을 때, 갑자기 귀신의 소리를 듣는 것 같던 충격 속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가슴이 뜨거워질 수가 있었으니…나는 아직 살아 있었던 거다.
살아오면서 나는 틈만 나면 시간 여행을 한다. 나를 정말 아프게 두들겨대던 그것들과 만났던 그 시간을 찾아가기 위해서 방황을 한다. 아아, 무엇이 또 나를 두들길까. 흠씬 터져서 나를 널부러지게 할 그런 것을, 또 무언가를, 그렇게 나는 기다리고 있다.
국민학교 3학년 때, 사촌언니가 갖고 있던 화집에서 고호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숨이 턱 막혀서, 막혀서…목구멍에 불이 붙는 줄 알았다.
같은 해였던가 아니면 다음 해였던가, 역시 그 언니의 다른 화집에서 샤갈의 전쟁을 보았을 때도 웬 무시무시한 영상이 내 머리에 한 방 먹인 듯했다.
그리고 그즈음에 들었던 베토벤의 곡들은, 나로 하여금 전생에 베토벤이었을 거라는, 지독한 집착에 빠지게 했었지. 얼른 자라서 독일로 날아가고 싶었었다. 베토벤의 음악을 베토벤의 고향에서 듣고 싶었다.
5학년 때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또 그렇게 나는 몇 날 며칠을 잠을 이루지 못 했다. 넘기고 또 넘기고…참으로 질기게도 그 책을 읽었었다. 나도 내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무언가를 그렇게 글로 옮겨놓을 수 있을까, 처연하게 집착했었다.
그 해에 나는 마론 브란도가 나오는 영화를 줄줄이 봤다. 세상에나! 그런 눈빛을 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니…! 한 번이라도 헐리웃에 가서 그 아저씨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얼마나 숱하게 했던가? 만나게 된다면 제일 먼저 무슨 이야기를 하나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한참 세월이 흘러서 그의 죽음 소식을 듣고서, 나는 이미 다 자란 어른인데도 불구하고 헝헝 울었었다.
또한 카페 데아뜨르에서 추송웅, 김금지 선생님의 '타이피스트'를 보고, 한국일보사 사옥 꼭대기에서 함현진 오빠가 나왔던 '고도를 기다리며'에 미쳐 버린 것도 다 그즈음이 아니었을까.
중학에 들어가서 토스토옙스키의 '백치'를 읽었을 땐 한 달을 잠을 못 자고 무이쉬킨의 모습에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마지막 장면 생각을 하다가는 엉엉 소리내어 운 적도 있었다.
그즘에 또 사이먼 앤 가펑클의 'El Condor Pasa'를 듣고 하늘을 보며 마냥 슬프고 절망적인 생각에 잠기는 버릇이 생겼다. 가사 한 줄 한 줄 집어삼킬 듯 외고 또 외면서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외로웠었다.
또한 드보르작의 'Violin Concerto op.64'에 빠졌던 것도 그 무렵이 아니였던가. 집이 떠나가라 음반을 돌리면 주무시던 아버지가 방문을 뚝뚝 두들기곤 하셨다. "잠 좀 자자."
우연히 들은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의 음반을 찾느라고 청계천의 레코드상을 뒤져대던 시간들도 있었다. 고교 때 크리스토퍼슨의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의 가사에 홀딱 빠져 밤이나 낮이나 흥얼거리며 기타를 긁어대 식구들을 괴롭히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미쳤었던 테리 잭스의 'Seasons in the Sun'만을 부르며 제2한강교를 추운 겨울에 몇 차례나 오락가락했는지…?
그리고 그 때 또 나를 정신 빠진 년으로 만든 건, 케스트너의 '파비안' -그 런 남자를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 콕도의 '무서운 아이들', 필립의 '뷔뷔 드 몽빠르나스'였다. 작은 손바닥 책들이 나달나달해지도록 읽고 또 읽었다.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그것들은 정말로 무서운 기세로 나를 두들겨댔고, 거기에서 헤어나오는 데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을 기억한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오면서 그렇게까지 무서운 충격으로 나를 때리는 것을 더 이상 만나지 못했다. 물론 그 때도 지금도 나를 감격시키거나 잠 못들도록 힘들게 한 것은 많았지만, 어떤 것도 어릴 때처럼 그렇게 오래도록 나는 아프게 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너무 아름다워서 아팠던 그 기억들…! 더는 그런 것들을 만날 수 없는 때가 묻어 버린 나 자신이 참 부끄럽고 싫었다. 그런데 두 해 전이었나, 조공례 선생님의 '진도 아리랑'을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밤에 전깃불도 켜지지 않은 어둠 속에서 들을 때, 갑자기 귀신의 소리를 듣는 것 같던 충격 속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가슴이 뜨거워질 수가 있었으니…나는 아직 살아 있었던 거다.
살아오면서 나는 틈만 나면 시간 여행을 한다. 나를 정말 아프게 두들겨대던 그것들과 만났던 그 시간을 찾아가기 위해서 방황을 한다. 아아, 무엇이 또 나를 두들길까. 흠씬 터져서 나를 널부러지게 할 그런 것을, 또 무언가를, 그렇게 나는 기다리고 있다.
이게 웬 괴물?
나도 몰라 보겠는 내 얼굴일세.
치과 다녀온 지 사흘 지났는데 아직도 붓기는 그대로.
붓기라 말하기도 미안한, 아예 괴물이 되어 버렸구먼.
거기다가 반대쪽은 침샘까지 막혀서 거의 그만큼이나 부어 버렸다.
침샘 때문에라도 이비인후과 가야 하는데, 그것도 큰병원 가라는데(동네 이비인후과에서 이르길), 그건 또 언제 가나.
하도 얼음찜질을 했더니 피부는 허옇게 일어나 미세하고 갈라지고 벌그죽죽, 이건 동상 걸린 거얌?
꼴이야 그렇다 치고, 약 기운 떨어지면 욱씬욱씬.
마치 영원히 이대로 살 것만 같은 불길한 기분.
물론 그럴 리야 없겠지만.
그나저나 언제가 돼야 빼꼼 문이라도 열어볼 것인가.
빌어먹을.
이게 마지막도 아니고, 앞으로도 몇 번이나 더 이 짓을 해야 하는지, 그러고도 끝이 과연 좋을 것인지 믿을 수도 없으니.
에고 사는 게 지겹다.
UMC/UW 3집 샀다는 거.^^ 글고 오늘밤 12시 45분에 EBS 공감스페이스에 UMC 나온다는 거. 나는 그걸 볼 거라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