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마당 2011. 1. 8. 11:33
에세이집을 내고 나니 책 처분이 문제다. 팔리건 안 팔리건 서점에 맡겨놓고 신경쓰지 않으면 되니까 거기에는 별 생각이 없는데, 그냥 돌리는 데가 내 머리 속을 복잡하게 한다.

일단 내가 아는 문인들-그 가운데서도 특히 수필을 쓰는 문인들한테는 공손하게 보낸다. 늘 받았으므로 내 것도 보내는 게 예의다. 사람들한테 인기 있는-성공담, 애들 성적 올리는 법, 사람 대하는 방법 등등, 또는 제법 이름이 난 작가의 소설이나 시, 그만치 유명한 이의 산문집 등등이 아닌, 수필을 쓰는 이들은 서로 책을 보내주고 사주고 하면서 상부상조하는 성격이 강하게 마련이다. 어떤 장르의 문학보다 자부심이 강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알아주지 않으니까 쓸쓸하게 하는 처사랄까.
이는 학교 교육의 결과이기도 하겠다. '수필이란, 좇을 隨 붓 筆이 뜻하는 것처럼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고 학교에서 배웠다. 더하여 '그러니까 일기도 편지도 수필이라고 할 수 있겠다.'고 선생님은 설명하셨다. 물론 그대로 외웠고,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내가 살다 보니까, 책을 읽다 보니까, 나이가 드니까, 그리고 나도 수필이라고 쓰다 보니까 그런 가르침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달았다. 스토리를 좇거나 감성을 자극하는 다른 장르와는 또다르게 문장을 다듬고 어휘를 찾아나서고 세상과 사물과 사람을 보는 눈을 길러 가슴으로 안으면서, 무엇보다도 깊이 사유한 결과가 수필인 게다. (물론 그렇다고 다른 장르는 그런 공부와 노력이 결여되었다는 게 아니다. 다만 일반인들이 그런 부분에 눈을 적게 주게 된다는 뜻이다.) 그저 적어대는 산문과는 구별되어야 마땅한 문학이 수필이다. 그런데도 대개들 쉽게 아무 거나 떠오르는 대로 그래서 연필이 움직이는 대로 적어내려가면 되는 게 수필이라고 하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애초 교육을 다시 시작해야 할 부분이다.

아무튼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은 지인들은 겁없이 말한다. "책 냈다며? 얼른 내놔." 이거 원, 내게 맡겨둔 것도 아니고. 전에 연극할 때 역시 그랬다. "공연한다며? 표 몇 장 줘." 마치 큰 인심이라도 쓰는 듯이, 가서 봐줄 테니까, 몇 사람 데리고 가 객석을 채워줄 테니까 표를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세월이 스무 해 이상 지났는데도 그런 사례에는 변함이 없다. "한 권만 보내."라는 그들한테 여유분이 넉넉치 않아 그럴 수 없으니 사 보라고 딱 잘라 거절한다. 자기들 생각에 수필이라는 게 그렇게 허접한 것이라면, 팔리지 않는 수필집 냈다면 아는 사람 입장에서 한 권이라도 팔아줘야겠다는 생각은 왜 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 여기서 수익을 내길 바란단 말야?" 그렇게 말하는 이가 있었다. 그러면 취미생활로 책을 내는 줄 알았더냐. 재벌님들이 자서전 내고 여기저기 공짜로 홍보하는 거라면 모를까. 아니 심지어는 그 재벌님들조차도 돈 내고 자기 것 사보는 사람이 많기를 바라는 마음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돈을 낸다는 것은 진지하게 읽을 의지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대박 터지기를 기대하며 책을 내진 않았지만, 아무한테나 돌리기 위해 낸 책도 아니다. 일 년에 제대로 된 책은커녕 잡지 한 권 읽지 않는다는 것 뻔히 아는데, 이번에 내가 쓴 '반려동물'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것 뻔히 아는데, 공짜라니까 한 권쯤 받아내야겠다고 생각하고, 혹시 누구 만나면 '내 친구가 책을 냈다."며 자랑거리(?)로 삼으려는 것 뻔히 아는데 거기에 책을 공짜로 던져줄 순 없는 것이다. 한 권도 팔리지 않아 방 귀퉁이에 수북하게 쌓아놓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함부로 처치할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정말 꼭 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책이 나왔다고 알리면서 행여 살까 봐 허겁지겁 보내고자 서둘게 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들 행동을 짐작할 수 있어 아예 책을 냈다는 말을 하지 않고 보낼 게 있으니 주소를 알려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한다.
그 사람에게 책이 나온 소식을 알리는 한편으로 그에게 건넬 책을 곱게 쌓아놨는데 어느 새 주문했다는 말이 들렸다. 기겁을 해서 얼른 취소하라고, 내가 주려고 준비했다고 말을 하니 흐흐 웃었다. "선생님이 주시는 건 제가 읽고, 주문한 것 오면 형한테 주지요 뭐."
웹으로 주문하려니 시간이 걸려서, 마음이 급해 직접 서점에 달려가 찾았다는, 두어 군데 돌아다닌 끝에 겨우 찾아 샀다는 지인은, 어느 새 밤을 새워 읽고는 웹으로 열 권을 더 주문했단다. 자기가 좋아하는 이들한테 선물을 할 작정이라는 거다. 찡, 심장이 울었다.
책읽기를 썩 즐기는 그이네는 요즘 한참 힘들 때다. 십여 년 하던 일을 실패하고 다른 일을 모색하는 중인 그이는 사는 데 약지 못해 성공하고는 담을 쌓고 살지만 남편을 이해하는 아내와 머리 맞대고 절약하며 사는 중이다. 그렇게 살아주는 것이 고마워 책 이상으로 내가 가진 것 무엇이든 보태고 싶게 한다. 그러나 나라고 무어 넉넉해 달리 줄 게 있는가. 그래서 그이를 줄 책을 포장해 이제 우체국에만 갖고 가면 된다. 그런데 오늘 아침 받은 출간 축하 전자우편에서 이미 책을 주문했다고 하는 게 아닌가. 그이들 살림에 단돈 천 원도 아쉬운 걸 아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자기 차, 아내 차 따로 굴리는 사람은 나를 보자마자 책 한 권 달라고 했다. 수입차 사고 보니 국산차는 불편해 못타겠다고 하는 사람도 대뜸 맡겨놓은 것 달라듯이 책을 달라고 했다. 주겠다는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전자우편으로 자기 주소를 적어 보내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다른 쪽에서는 그렇듯 내게 한 마디 말도 없이 책을 주문했다 하고 샀다 했다. 세상 눈으로 보면 가난하고 앞으로도 가난할 사람들이다. 전자들은 어느 새 내 마음에서, 혹은 내 수첩에서 직접 이름이 지워졌다. 아마 앞으로 내편에서 먼저 연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후자들은 아직 정리해 넣지 않은 새해 수첩에서 조금 더 앞에 이름을 적어넣게 되겠다. 앞으로 남은 그이들 평생, 소위 성공한 사람들 눈으로 보면 지지리 궁상을 떨며 살겠지만, 내게는 그이들이 드러내 자랑(?)할 수 없는 많은 것을 가졌다는 것을 확신한다. 새해 덕담으로 "부자 되세요~!"가 지긋지긋하게 난무하지만, 정작 그 소박한 이들에게 진정한 마음을 담아 그 덕담을 보내고 싶다. "영원히 (마음)부자 되세요~!" 라고.
Posted by 구름할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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